마음이 공허할 때 — 텅 빈 느낌이 계속되는 이유
슬픈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닙니다. 밥도 먹고 출근도 하고 사람도 만납니다. 그런데 하루가 끝나고 불을 끄면 속이 그냥 비어 있어요. 뭘 하고 싶은지 물으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고, 재미있다는 것들도 화면만 지나갑니다.
공허함은 아픈 감정이 아니라 감정이 있어야 할 자리가 비어 있는 상태에 가깝습니다. 그래서 설명하기가 유독 어렵습니다. 누가 왜 그러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어요. 나쁜 일이 없어서, 나쁘다고 말하기도 애매합니다.
우울과는 조금 다릅니다
둘이 같이 오는 일도 많지만 결이 다릅니다.
- 우울은 무겁습니다. 마음이 가라앉고, 몸이 무겁고, 자책이 따라옵니다. 뭔가가 더해진 느낌이에요.
- 공허는 가볍습니다. 아프지 않고 그냥 없습니다. 좋지도 싫지도 않고, 슬프지도 않아서 울음도 안 나와요. 뭔가가 빠진 느낌입니다.
그래서 공허함은 더 오래 방치됩니다. 아프면 병원을 떠올리는데, 안 아프면 그냥 지냅니다. 몇 달, 몇 년씩 이대로 지내는 사람이 꽤 많습니다.
어디가 빈 건지부터
공허함은 대개 셋 중 한 자리가 빈 겁니다.
- 의미가 빈 자리. 할 일은 많은데 이걸 왜 하는지 모를 때 옵니다. 목표를 이룬 직후에도 자주 와요. 시험이 끝나고, 이직에 성공하고, 오래 준비한 게 끝난 다음 날. 방향이 사라진 자리가 그대로 비어 있습니다.
- 연결이 빈 자리. 사람은 곁에 있는데 아무한테도 진짜 이야기를 안 한 지 오래된 경우입니다. 하루 종일 말은 했는데 마음은 한 번도 안 꺼냈을 때요.
- 감정이 눌린 자리. 오래 참는 자리에 있으면 감정이 통째로 조용해집니다. 화도 안 나고 기쁘지도 않습니다. 힘든 것만 끄고 싶었는데 스위치가 하나라서 좋은 것까지 같이 꺼진 거예요.
세 번째가 특히 오해받습니다. 무뎌진 걸 두고 "내가 차가운 사람인가" 하고 넘기는데, 대개는 성격이 아니라 오래 버틴 결과입니다.
지금 어디쯤인지 — 자가 점검
진단이 아니라 상태를 정리하는 목록입니다. 최근 두어 주를 떠올리며 봐주세요.
- 뭐 하고 싶냐고 물으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는다
- 좋아하던 것을 해도 예전만큼 좋지 않다
- 기쁜 일에도 반응이 한 박자 늦다
- 주말이 끝나면 뭘 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
- 영상이나 SNS를 오래 보는데 재미있어서는 아니다
- 사람을 만나고 와도 채워지는 느낌이 없다
- 속상한 일이 생겨도 별로 속상하지 않다
- 새로 사고 나면 그 순간만 괜찮고 금방 원래대로다
- 하루가 그냥 지나갔다는 느낌이 자주 든다
- 이 상태가 몇 달 넘게 이어지고 있다
여러 개 해당돼도 이상한 게 아닙니다. 다만 오래 두면 무기력이나 가라앉은 기분으로 넘어가기 쉬워서, 지금 알아차린 건 나쁘지 않은 시점입니다.
왜 채워도 안 채워질까
공허할 때 사람은 대개 뭔가를 넣습니다. 쇼핑, 영상, 술, 게임, 새 연애. 그 순간에는 확실히 덜합니다. 그런데 다음 날 원래대로 돌아오고, 어떤 날은 더 큽니다.
자극은 빈자리를 채우는 게 아니라 덮어두는 쪽이기 때문입니다. 덮으면 안 보이니까 편한데, 걷어내면 그대로 있어요. 게다가 같은 크기로는 점점 덜 덮여서 자꾸 더 센 걸 찾게 됩니다.
실제로 채워지는 건 대체로 지루하고 느립니다. 몸을 쓰는 일, 남을 돕는 일, 손으로 뭘 만드는 일, 누군가에게 속을 꺼내는 일. 하는 동안 특별히 즐겁지도 않은데 하고 나면 이상하게 덜 비어 있습니다. 재미와 충족은 다른 회로예요.
오늘 해볼 수 있는 것
- 기분 말고 몸부터. 마음이 안 움직일 때는 마음을 설득하려 하지 말고 몸을 먼저 움직이는 편이 빠릅니다. 20분 걷기 정도면 충분합니다. 기분이 좋아져서 걷는 게 아니라 걷고 나면 조금 돌아옵니다.
- 화면 없는 시간 30분. 공허함은 조용한 시간이 무서워서 계속 채우는 동안 커집니다. 짧게라도 아무것도 안 트는 시간을 만들면 그동안 안 들리던 게 들립니다.
- 아주 작은 완결. 오늘 끝나는 일 하나를 만들어보세요. 서랍 한 칸, 설거지, 화분 물주기. 끝났다는 감각이 며칠 없으면 하루가 통째로 흐릿해집니다.
- 남에게 쓰는 10분. 누구든 도움이 되는 일을 짧게 해보세요. 안부 한 통이어도 됩니다. 의미는 혼자 생각할 때보다 남과 닿을 때 더 잘 생깁니다.
- 좋았던 때를 뒤져보기. 마지막으로 시간 가는 줄 몰랐던 게 언제였는지 떠올려보세요. 그게 힌트입니다. 잃어버린 게 아니라 안 한 지 오래된 경우가 많습니다.
- 말이 안 나오면 글로 먼저. 공허함은 말로 꺼내기 어려운 축입니다. 안에서 맴돌 때는 한 줄이라도 밖으로 옮겨두면 모양이 조금 잡힙니다.
오히려 더 공허해지는 것들
- 계속 켜두기. 눈 뜨자마자 화면, 잘 때까지 화면. 빈 시간이 없으면 편한데, 그만큼 안이 조용해집니다.
- 큰 변화 하나로 해결하려 하기. 퇴사, 이사, 새 연애로 한 번에 바꾸려는 시도는 잠깐 효과가 있고 대개 몇 달 뒤 같은 자리로 옵니다. 자리를 옮겨도 빈 칸은 따라옵니다.
- "배부른 소리"라고 스스로 자르기. 남들과 비교해서 자격을 따지면 말할 데가 더 없어집니다. 힘든 데 조건이 붙는 건 아닙니다.
- 느낌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기. 하고 싶어지면 하겠다고 미루면 대개 안 옵니다. 순서가 반대라서, 조금 해보면 그다음에 마음이 따라옵니다.
- 술로 저녁을 넘기기. 그날은 덜한데 다음 날 아침이 더 비어 있습니다.
도움을 받는 편이 나은 신호
- 잠·식사·일상이 몇 주째 흐트러져 있다
- 즐겁던 일이 하나도 즐겁지 않은 상태가 두 달 넘게 이어진다
- 내가 있으나 없으나 같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
- 비어 있는 느낌을 술이나 약으로 넘기는 날이 늘고 있다
- 살아있다는 느낌을 확인하려고 위험한 행동을 하게 된다
마지막 두 가지에 해당한다면 기다리지 말고 지금 연락해보세요. 자살예방 상담 109는 24시간 열려 있고, 이름을 밝히지 않아도 됩니다.
말할 데가 마땅치 않을 때
공허함은 꺼내기가 애매합니다. 무슨 일 있냐고 물으면 대답할 사건이 없어요. 그래서 "그냥 좀 그렇다"에서 대화가 끝나고, 몇 번 그러고 나면 아예 말을 안 꺼내게 됩니다.
이럴 때 처음 한 마디는 나를 아는 사람이 아닌 쪽이 오히려 쉽습니다.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곳에 지금 상태를 그냥 적어두는 것만으로도 맴돌던 게 밖으로 한 번 나옵니다. 잘 쓸 필요도, 결론을 낼 필요도 없습니다. 밖으로 나온 문장은 머릿속에 있을 때보다 덜 막막해 보여요.
몸이 안 움직인다면 아무것도 하기 싫을 때, 가라앉은 기분이 같이 온다면 우울한 기분이 이어질 때, 사람 사이에서도 허전하다면 외로움이 오래 갈 때도 함께 보세요.
하나만 남긴다면
공허함은 잘못 살아서 생기는 게 아니라, 채워지는 자리를 오래 안 써서 생깁니다. 그래서 더 센 자극이 아니라 작고 느린 것들이 답이 됩니다.
오늘은 하나만 해보세요. 20분 걷기여도 되고, 화면을 30분 끄는 것이어도 되고, 아무도 모르는 곳에 한 줄 적어두는 것이어도 됩니다. 비어 있는 걸 알아차린 것부터가 이미 한 칸입니다.
말할 데가 마땅치 않을 때, 이름 없이 적어두는 것만으로도 조금 가벼워집니다.